*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첫 시험에서 낙방하고 서른 둘의 늦은 나이에야 겨우 과거에 급제했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 장교로 돌았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들과의 불화로 몇 차례나 파면과 불이익을 받았다.
*몸이 약하다고 고민하지 마라.
나는 평생 동안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고통 받았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마라.
나는 적군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 제독이 되었다.
*조직의 지원이 없다고 실망하지 마라.
나는 스스로 논밭을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고, 스물세 번 싸워 스물세 번 이겼다.
*윗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갖지 마라.
나는 끊임없는 임금의 오해와 의심으로 모든 공을 뺏긴 채 옥살이를 해야 했다.
*자본이 없다고 절망하지 마라.
나는 빈손으로 돌아온 전쟁터에서 열두 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을 막았다.
*옳지 못한 방법으로 가족을 사랑한다 말하지 마라.
나는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었고, 또 다른 아들들과 함께 전쟁터로 나섰다.
*죽음이 두렵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적들이 물러가는 마지막 전투에서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
*공을 탐하지 말라.
충무공은 모든 공을 부하에게 돌렸고 장계의 맨 끝에 이렇게 썼을 뿐이다. “신도 싸웠습니다.”
*끊임없이 공부하라.
전략과 전술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로 첫 번째 나간 해전에서부터 연승했다.
*정보를 모으라.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어떤 경쟁에서도 마찬가지다.
*유혹에 흔들리지 말라.
승진욕, 금전욕, 명예욕 등 욕심이 큰 뜻을 망가뜨린다.
*결정은 명쾌하게 하라.
상벌이 이리저리 흔들리면 리더십이 흔들린다.
<명량해전을 앞두고 필패의 두려움에 떨고 있을 장병들에게 충무공께서 내리신 가르침>
"조선 수군은 패배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전멸할 것이며, 그러므로 이곳 명랑의 바다는 조선 수군의 무덤이 될 것이다. 적이 그렇게 믿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아군들도 우리 조선 수군의 패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지난 6년간 수많은 전장에 부하들을 세워왔고, 단 한 번도 진 바 없다. 그것은 승리를 자신하지 못하는 전장으로 부하들을 이끈 바 없기 때문이다.
허나 이번에는 나 역시 아무것도 자신할 수 없다. 수십 배에 달하는 적과 싸우기에는 우리가 가진 병력이 너무도 일천하며, 또한 우리 조선 수군이 싸워야 할 울돌목의 저 험준한 역류는 왜적보다 더욱 무서운 적이 되어 우리 앞을 가로막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악조건을 안고서라도 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전장으로 나갈 것을 희망한다.승리에 대한 확신은 없다. 단 한명의 전상자도 없이 전장을 벗어나리라 장담할 수도 없다.
오직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약조는 내가 조선 수군의 최전선을 지키는 전위군이 되겠다는 것 그것이다. 대장선이 가장 먼저 적진으로 진격할 것이며, 적을 섬멸하지 않는 한 결코 이 바다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니 목숨과 바꿔서라도 이 조국을 지키고 싶은 자, 나를 따르라!"
충무공 난중일기 어록 모음
"대장부로 세상에 나와 나라에서 써 주면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할 것이오. 써주지 않으면 야인이 되어 밭갈이하면서 살리라."
충무공이 1576년(선조 9) 2월 식년 무과에 임용 발령을 조용히 기다리며 한 말로 자신의 보직이나 출세를 위하여 권문세가에 출입하여 아첨하거나 영화를 탐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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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고 사는 것은 천명인데, 술은 마셔 무엇하며, 목이 마르지도 않은데 물은 무엇 때문에 마시겠는가? 어찌 바른길을 어기어 살기를 구한단 말이오!"
1586년(선조 19 1월) 함경도 조산원 만호(종 4품)으로 있었다. 1587년 8월에는 함경도 최북단 두만강 입구에 있는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이해 겨울 여진족이 기병을 이끌고 대거 침입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특별한 방어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여진족을 격퇴하였고 포로 된 자 60여 명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이때 병마사 이일은 호출하여 문초 받을 때 선거이에게 한말. 그러나 모든 잘못을 것을 이순신에게 전가하여 백의종군케 하였다.
"죄가 있고 없는 것은 나라에서 가려낼 일이지만 한 나라의 대신이 옥중에 계신데
이렇게 방에서 풍류를 즐기고 있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1589년(선조 22) 7월 정언신이 나해 귀양지에서 한성으로 다시 끌려와 옥중에 갇혀 있었다. 이분은 정여립의 역모사건에 까닭 없이 연루되어 65세에 죽었다. 정언신(정여립과 9촌)은 이순신에게는 은사요 상관이었으며 또 평소에 존경해 왔던 분이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정읍에서 한성의 옥에 갇혀있는 정언신을 문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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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차라리 식구를 많이 데리고 온 죄를 입는 한이 있어도 이 의지할 곳이 없는 것들을돌보아 주지 않을 수 없다."
1580년 둘째 형 요신(堯臣)이 먼저 죽고 이듬해에는 큰형 희신(羲臣)마져 죽으니 두형의 자녀들은 할머니가 키우셨는데 마침 충무공께서 정읍 현감으로 있을 적에 함께 있게 되었다. 박 생원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남솔(濫率)이라고 고발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제 적을 상대하여 승패의 결단이 호흡 사이에 걸렸다. 장수된 자가 죽지 않았으니 누울 수가 있겠느냐."
1593년 3월 경 남해에 전염병이 번졌을 때 공도 병에 걸려 12일 동안이나 고통을 당하며군무를 보니 아들이 휴양하기를 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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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론 교서를 외우나 얼굴에는 군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1595년 5월 29일 일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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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 충성을 바치려 했건만 죄에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했건만은
어버이마저 돌아가셨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 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으랴 어서 죽느니만 못하다."-1597년 4월 19일 백의종군하면서 아산에 이르러 어머니의 돌아가심을 듣고.
"이제 제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을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제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1597년 7월 16일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였다. 8월 3일 충무공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는데 12일 후 선조는 선전관 박천봉이를 시켜서 밀지를 가지고 왔는데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과 합세하여 육전 하라"라는 말에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수군을없앨 수는 없다며 올린 장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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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마라. 군사를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
1598년 11월 19일(약력 12월 16일) 이른 아침 노량 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시며 하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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